♣가을 이야기♣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
우리들의 현실은 지나간 과거처럼 보인다.
이삭이 여문 논밭은 황홀한 모자이크
젖줄같은 강물이 유연한 가락처럼
굽이굽이 흐른다.
구름이 헐벗은 산자락을
안쓰러운 듯 쓰다듬고 있다.
시골마다 도시마다
크고 작은 길로 이어져 있다.
아득한 태고적 우리 조상들이
첫걸음을 내디디던 바로 그 길을
후손들이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 길을 거쳐
낯선 고장의 소식을 알아오고,
그 길목에서
이웃 마을 처녀와 총각은 눈이 맞는다.
꽃을 한아름 안고
정다운 벗을 찾아가는 것도 그 길이다.
길은 이렇듯
사람과 사람을 맺어준 탯줄이다.
그 길이 물고 뜯는 싸움의 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람끼리 흘기고 미워하는
증오의 길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다.
뜻이 나와 같지 않대서
짐승처럼 주리를 트는 그런 길이라고는
차마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미워하고 싸우기 위해 마주친 원수가 아니라,
서로 의지해 사랑하려고 아득한 옛적부터
찾아서 만난 이웃들인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 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생자필멸, 회자정리,
그런 것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다음에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 법정 스님의 가을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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