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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묵상(마르코 1,21ㄴ-28)

까치산 2026. 1. 13. 10:32

 

 

연중 제1주간 화요일

1사무엘 1,9-20   
마르코 1,21ㄴ-28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대비되는 두 개의 간청을 만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그 안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이렇게 외칩니다.
세상은 하느님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성 안에 존재합니다. 한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우리 모두는 가시적으로든 비가시적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이러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고립시키는 힘은 악에서 나옵니다. 악은 끊임없이 너와 내가 아무 관계가 없으니 상관 말라고 부추기며 소외와 절망을 퍼트립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제법 옳은 소리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원을 꿰뚫고 있습니다.그런데 존중과 경외심이 들어 있지 않은 앎은 공허하고 자칫 폭력도 될 수 있습니다.거룩하신 분께 대한 더러운 영의 외침은 그가 어떤 말을 했든 두려움과 공포가 수선스럽게 표출된 호들갑에 불과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와 확연히 대비되는 간청이 흐릅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1사무 1,11)...
한나의 기도입니다. 그녀는 하느님께 자기와의 관계를 기억해 주시라고, 자기 삶에 들어와 주시라고,더 강력하게 개입해 달라고 청합니다. 더러운 영이 주님을 관계에서 밀쳐내려 했다면,한나는 그 관계성에 기대어 호소합니다. 더 깊은 관계를 맺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겁니다.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1사무 1,17).
사제 엘리는 잠시 그녀를 오해하긴 했지만 이내 그녀를 축복합니다. 그녀의 길고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술주정이 아니었다면 하느님과 진정한 관계 안의 간청일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1사무 1,18).
눈물의 기도는 종종 슬픔과 절망을 희석해 줍니다. 거기에 엘리의 격려까지 받았으니 한나는 위로와 확신으로 어둠에서 걸어나옵니다.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1사무 1,20).
주님께서는 한나가 바란 대로 그녀를 "기억해"(1사무 1,19) 아들을 주십니다. 엘리의 입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보답으로 한나는 아이의 이름에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성을 새겨 넣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엘리의 입을 빌어 기도에 응답을 주셨지만, 지금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굳이 다른 목소리를 빌릴 필요가 없으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 친히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외침은 그 내용이 아무리 명예롭고 영광스러워도 언급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침묵" 뿐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예수님의 구마 행위에 모두 놀랍니다. 놀람과 경탄은 하느님의 일에 열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더 이상 경이로울 것이 없다면 그의 영혼은 이미 박제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군중의 입에서 나온 "새로움"과 "권위"는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과 맺으실 새 계약을 가리킵니다.

더러운 영은 멀리 있지도 않고 한눈에 알아볼 만큼 흉측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에 대한 해박하고 화려한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주님께 가까이 오지 말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적당히 선을 긋고 내 삶에 너무 깊이 끼어들지 말기를 청하지요.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삶의 가치관과 지향은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지대를 확보한 채 적당히 신자이고 적당히 의인인 듯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궁금하다면, 한나의 기도에서 답을 찾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내게 꼭 필요하다"는 절절한 하소연은 그분과 내가 서로의 가슴을 가르고 들어갈 만큼 친밀하고 간절한 기도이고, 그 자체가 곧 사랑이고 관계입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과 또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고 이 관계의 불편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복음 강론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