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5주일
신명기 30,10-14
콜로새 1,15-20
루카 10,25-37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이웃의 범위를 명확히 규명하고 이웃의 개념을 정의 내릴 수 있으면, 사랑을 실천하는 데 유익하거 유리한가? 적어도 오늘 복음을 놓고 볼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2)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3)
강도를 만나 강탈당하고 구타당하여 사경을 헤매는 한 여행자를 두고, 세 명의 목격자가 있었다고 비유는 말합니다. 강도를 만나 위기에 처한 여행자의 여행경로(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향하는)를 놓고 볼 때, 그는 신심 깊은 유대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서 제시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레위기의 규정에서 앞뒤 문맥을 놓고 볼 때, 이웃은 동포 혹은 동족으로 정의됩니다.
이 사실을 사제와 레위인이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레위기의 이 규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또한 위기에 직면한 그 여행자가 신심 깊은 유대인, 즉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그들이 선택한 건 외면과 회피였습니다. 이를 두고 복음은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이야말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레위기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세우신 다윗 왕조를 거슬러 대립 왕조를 세움으로써 정치적으로 분리된 자들이며, 아시리아의 이주 정책으로 이방인과 피가 섞임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한 자들이며, 하느님의 지상 거주지 예루살렘 성전과 결별하고 그리짐산에서 자체적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감으로써 신앙의 순수성(하느님 신앙)을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건 이웃이냐 아니냐는 범위의 규명이나 개념 정의가 아니라,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복음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다.”며 두 데나리온을 선뜻 지불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은 이 행위의 시작이 ‘가엾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입니다.결국 사랑의 실천은 이웃의 범위를 규명하고 개념을 정의하는 머리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이를 가엾이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묵상하며,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 대전교구 박 종훈 안토니오 신부님 복음 묵상 글에서 -
'그룹명 > 사랑과평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늘의 복음 묵상(마태11,20-24)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0) | 2025.07.15 |
|---|---|
| 오늘의 복음 묵상(마태10,34-11,1) (0) | 2025.07.14 |
| 오늘의 복음 묵상(마태오 10,24-33) (4) | 2025.07.12 |
| 오늘의 복음 묵상(마태오 10,16-23) -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2) | 2025.07.11 |
| 오늘의 복음 묵상(마태오 10,7-15) (4) | 202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