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전교 주일)
이사야 2,1-5
로마 10,9-18
마태오 28,16-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ㄴ)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제자들은 갈릴래아를 떠나 산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모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지만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마태 28,16-17 참조). 주님의 부활을 마주하고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되는 제자들의 모습이라기에는 너무나 당혹스럽지만, 그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어쩌면 오늘 복음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요.
‘복음화’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우선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로마 10,14-17 참조),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적인 소명을 비롯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봉사의 삶을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나아가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성사적 실천으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복음화’의 모습일 것입니다.하지만 우리는 ‘복음화’라는 단어를 마주하고서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종종 혼란에 빠집니다.뵙고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으로 ‘순명’하면서도,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심’ 합니다.
복음은 분명 기쁜 소식이지만, 우리에게 복음은 정말로 기쁜 소식이 되어 있을까요?
복음을 선포하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고민을 던져주었을 것입니다.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가장 먼저 ‘복음화’라는 단어의 무게부터 우리의 삶에서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 언제나 함께해 주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서품 예식 때, 주교님은 서품을 청원하는 신부에게 ‘주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에 힘입어 이 사람들을 뽑아 사제품에 올리겠다’고 대답합니다.
또한 사제품 후보자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봉헌하겠습니다”라고 서약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합당함을 자랑함으로써 ‘복음화’를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오히려 복음화는, “우리의 도우심은 주님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시편 124,8) 라는 노랫말처럼,‘하느님의 도우심’을 삶으로 온전히 믿고 고백하여 살아냄으로써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의 ‘경배드리면서도 의심하는 제자들’은 어쩌면 그분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진정한 복음 선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ㄱ). 예수님의 명령인 ‘복음선포’는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는 삶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그 여정에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 광주대교구 함 경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묵상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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