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조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말하였습니다.
우리말에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용서의 횟수는 베드로에게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의 용서가 아니라
횟수와 범위에 상관없는
무한대의 용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예수님께서는 빚진 자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소유는 물론하고
제 몸과 가족들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진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하루 노동의 값이 한 달란트였던 시대에
일만 달란트의 빚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분량입니다.
임금 혹은 주인이라고 소개된 채주는
그 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모든 빚을 한꺼번에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에서
오직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에
빚에서 자유하게 된 사람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 비유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은총으로 사하신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인에게서 엄청난 은총을 입은 이 사람이
자신에게 빚을 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빌려준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백일동안 일하면 벌 수 있고
친구의 애원대로 조금만 기다리면
얼마든지 돌려받을 수 있는 분량이었지요.
친구의 목을 조르고 옥에 가두는
그의 악한 마음은 결국 주인의 분노를 샀고
그는 악한 종이라는 멍에와 함께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갇혔습니다.
갚을 수 없는 만큼의 빚이기에
옥에 갇힌 그는 무기수였고
이는 해결하지 못한 죄를 가진 자가
장차 받게 될 영원한 형벌에 대한 가르침이셨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이
너도 네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였던 야고보는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 2,13)
주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서는
내 감정이나 기준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하시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 가사방에서 옮김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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