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욥기 42,1-3.5-6.12-17
루카 10,17-24
겸손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 오늘 복음(루카 10, 17-24)은 앞 부분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결과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드문 표현인 예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파견 하실 때 그들은 문자 그대로 빈 털털이의 모습이었다.단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란 선포의 말씀과 "병자들을 고쳐 주어라"란 치유의 명령만을 그들 스승에게서 부여받았다.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제자들의 앞길은 암담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을 따랐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기뻐하며 돌아온 제자들의 결과 보고를 듣고 예수도 큰 기쁨에 가득차 환희의 찬가를 부른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란 이방 칼데아 지방의 현인과 점성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인과 율법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 내신다. 이것은 복음서의 중심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며,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이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구약 묵시 문학에도 이와 비슷한 찬가가 있다.
다니엘 2장으로 지혜와 능력은 하느님의 것이니 이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 드린다 (2:20-23). 하느님께서는 당시의 유명한 마술가나 점성가를 물리 치시고 포로 출신인 다니엘에게 당신의 계시를 밝힌다.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뜻한다.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겸손하고 못난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예수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못난 사람들, 철부지들)에게도 실현 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아버지의 이 응답에 기뻐 감사한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니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신성을 나타낸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본성 자체의 탐구보다도 관계를 통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을 인간들에게 알맞게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아들이 택한 바로 그런 사람들 즉, 미소한 이들에게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마침내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절정에 달한다.
예수는 참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원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놀라운 기쁨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바로 예수와 같은 겸손하고 가난한 자세이다.
- 서울대교구 김 웅태 요셉 신부님 묵상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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