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집회서 3,2-6.12-14
콜로새 3,12-21
루카 2,41-52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간에 사랑의 막을 쳐야 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한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정교회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1979.1.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라고 하셨으며 그 때문에 가정 사목에 중점을 두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가족관계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의 교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누구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에 속한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가정을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도록 초대하고 있다.
복음: 루카 2,41-52 :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이고,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루가 24,26.46-47).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자렛 가정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분위기는 마리아가 걱정하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48절)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보는 가정은 모두가 아무런 번민, 즉 갈등, 오류, 실패, 질병,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만큼 이상적인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모두 이럴 수 있다.여기서 신앙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가족들을 더 가깝게 일치시켜 주고밝은 희망을 줄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 하느님을 통해 보이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1-52절)라고 복음을 맺고 있는 것을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의 사고를 요구하는 대목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50절) 한다.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가 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일 것이다. 이 신비는 그의 부모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 과정에 있는 인간존재 안에는 ‘신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제2독서: 골로 3,12-21: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콜로새서에서도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각자는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날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이 자연적 가정에도 새로운 힘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자렛 가정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2천 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조 욱현 토마스 신부님 묵상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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