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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묵상(요한 6,1-15) -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까치산 2024. 7. 28. 10:04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2열왕기 4,42-44    
에페소 4,1-6      
요한 6,1-15

 "불가능을 넘어서는 믿음의 힘"

 
배고픈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라고 하신다. ‘우리’보고 ‘나’더러….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무려 오천 명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 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하고 물으신다. 수많은 군중에게 먹일 빵 걱정에 필립보에게 물으신 것이다. 필립보는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말이 200데나리온이지 어마어마한 액수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포도원 일꾼의 하루치 일당(마태 20,1-16 참조)이니, 200데나리온은 200명분 일당으로 지금도 매우 큰 돈이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빵을 살 만한 그런 큰 돈도 없었지만 설령 돈이 있었어도 빵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변에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대형 마트 또는 빵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필립보의 답변은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로만 끝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기서 하나,

혹시 ‘나’는 필립보처럼 상식이라는 핑계로 당연히 고민해야 할 사항을 회피하거나 지나치지는 않았나? 혹 해야 할 사항을 합리성으로 포장해 포기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았나? 과연 위기 탈출은?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하고 말하였다. 수많은 군중을 먹이기에는 이것으로 불가능하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입장이 앞서 필립보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그나마 적지만 음식이 있다는 정도가 다를 뿐.

여기서 둘, 

혹 ‘나’는 어떤 가능성에도 눈감은 채 안 된다고만 생각하고 고집 피우지는 않았나? 혹, ‘나’는 하기 싫어 핑계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닌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는데,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예수님은 그 적지만 소중한 음식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으로 장정만도 5천 명을 먹이셨다. 그리고 먹고 남은 음식 조각이 12 광주리에 가득 찼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필립보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도 불가능하다고 완곡히 말했던 일들을 차고 넘치도록 만들어 내심이 반전이다.

실증적 사고에 이미 익숙해 있고 현대 과학에 더 많은 것을 기대며 사는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가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믿어 고백하는 우리는 이 상황을 다르게 대면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가능을 넘어 그것으로 완벽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고백해야 한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희망의 신앙이라고 믿는다.

그분은 불가능을 희망의 가능성으로 바꾸는 우리의 태도를 보시고 그분은 결과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우리는 일상에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많다. 하고자 하는 방법을 찾기 보다 안 된다는 핑계를 찾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작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내어 맡기고 그것으로 결과를 완벽하게 만드시는 분에게 의탁하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예수님은 바로 떠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 하자 혼자서 물러가신 것처럼….

 

- 인천교구 김 현수 토마스 신부님 묵상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