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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의 비유
한 아기가 어떻게 기는지를 배워 마침내 기는 데는 선수가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산책하는 데 아기를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문을 열고 거리고 나왔을 때 아기는 매우 흥분하였다.
지금까지 그의 세계는 무릎과 발목으로 기어다니는 것이었으나 아기는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다른 사물을 보고 아버지가 걷는 속도에 따라 움직였다.
만일 여러분이 산책 나온 아기를 주의 깊게 본다면 일반적으로 아기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애쓰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가 다시 마루에 내려놓으면 아기는 실망한다.
아기 혼자서는 기어 다닐 수밖에 없다.
그 아기가 다시 그 체험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걷기 전에는 기는 것이 그가 아는 전부로서 그것으로 만족하였지만
이제는 기는 것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아기는 걷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기 전의 상태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이것이 우리 기도생활의 초기 단계와 흡사하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아기이다.
우리가 진보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걷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팔에 안긴 아기처럼 하느님이 우리를 안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도 아기와 같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실제로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도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우리의 결점들이 없어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길에서
실제로 걷는 것을 배운 표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즉 하느님이 우리를 팔에 안고 계신 것이다.
걸을 수 없게 하는 우리의 약점들이 없어진 게 아니라 잠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가려졌을 뿐이다.
아버지의 팔에 안겼던 아기처럼 우리 역시 그분이 당신 팔에서 내려놓으면
기도가 점점 어려워지고 우리의 약점들은 되살아나며 우리를 실망시키는
모든 상황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주님과 함께 걷는 즐거움을 한번 맛보게 된 다음에는 다시는 땅에서 배로
기어다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이때가 우리 기도생활의 위기이며 위험한 전환점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걷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 잘못하면 기도에 대한 체험은 자기기만이며, 하느님은 우리를 저버리셨고,
기도는 시간 낭비라고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악마는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을 확신시키려고 계속 유혹한다.
우리는 상처 입은 자존심이나 악마의 유혹을 거슬러 이기려면 기도의 대가들이 말하는
좋은 영적 지도와 규칙적인 독서가 필요하다. -상동-
- 김홍언 요한 보스코신부님의 '새벽을여는 영성의샘물' 중에서(가사방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