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계시의 핵심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사랑하기 위해
진정으로 애써야 하며, 내 모든 삶이 사랑에 귀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줌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하는 존재,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자기를 발견하는 존재다.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타인들을 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정복하거나 소유하거나 합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풍부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기 위해 타인들을 향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치 식도락가가 참새를 좋아하듯이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동화시키려 드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이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들을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삼위가 서로 사랑하시듯 사랑하려면 가능한 가장 깊이, 가장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니어야만 한다.
가능한 가장 깊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타인들이 존재하게 해야 한다
생각 또는 마음으로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나는 네가 너로서 존재하기를 원하며,
네가 온전히 너 자신에게도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나의 전 존재를 바친다.
이것은 개인에게뿐 아니라, 나라, 종족, 문명들에게도 참이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개인적 삶에서건, 또는 가정.직업. 국제 사회의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 자유의
행사가 문제 되는 경우이건, 결국 모든 문제는 사랑에 대해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조건과 결과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것들과 연관되어 있는지,
또한 그것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환상은 어떤 것인지 가르치기 위하여,
교회는 여러 세기를 거치며 교회에 주어진 성령에게 물어 왔다.
성령만이 하느님의 비밀을 아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처럼 살 수 있게 하는, 즉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를 주신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형태의 삶이다.
적어도 이것을 선물로서-왜냐하면 그 삶 자체는 우리 힘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리고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이 즐겨 말했듯, 자기를 죽이고
내어 주는 것인 '통행세'를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의"오직 사랑이신 하느님" 중에서(가사방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