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전해주는 민들레 홀씨
한 선배 성직자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남파된 간첩들이 태백산을 넘어오다 발견되었습니다.
2천여 명의 군인이 포위한 끝에 그들은 독안에 든 생쥐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수하지 않고 결국 수류탄으로 자폭해 죽었습니다.
죽어 널브러진 그들의 시체를 짜 맞추어 연병장에 전시용으로
늘어놓았습니다.
당시 그 성직자는 연병장에 놓인 그 시체를 보며 몇 가지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째 충격은 ‘그들이 그들의 사상을 위해 자폭했던 점’이었습니다.
둘째, 충격은 ‘그들이 신고 있는 통일화의 매듭을 완전히 묶어버린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신발을 벗지도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입니다.
셋째 충격은 ‘그들이 신고 있는 통일화 밑바닥이 다 헐었고 발바닥을
대검으로 찔러 보았는데 대검이 튕겨 나올 정도로 단단했던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을 위해 엄청난 고통을 참았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처럼 자신의 사명에 목숨을 건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더욱 사명감에 사로잡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사명에 목숨을 거는 모습처럼 사람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는 장면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눈물을 뿌려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때로 핏자국도 남겨야 합니다.
사람이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가에 따라 그 인생과 인격의 척도가
드러나게 됩니다.
믿는 사람은 복음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가에 따라 그 믿음의 척도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요즘 복음의 사명을 느끼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다른 사상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비웃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국교회의 원로로 지내는 한 성직자가 대전교도소에 오랫동안
수감 중인 남파된 간첩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 성직자가 그에게 복음을 전하자 그 간첩은 코웃음 치면서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에는 명령만 떨어지면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남한으로 내려올 사람이 백만 명이나 있소. 그런데
당신네들 중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북한으로 올라갈
사람이 몇이나 있소? 어느 것이 진짜요?”
그 말을 듣고 그 성직자는 얼굴을 붉힌 채 그 교도소를 도망치듯
나왔다고 합니다.
신자가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명을 미루면 축복도 미뤄지지만 사명을
가까이하면 축복도 가까워질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서 가장 나쁜 욕 중의 하나가 ‘빌어먹을 자식’이라는 욕입니다.
누가 빌어먹을 자식입니까? 자기의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달라!”고만 하는 사람이 빌어먹을 자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달라!”는 마음으로 살면 점차 빌어먹을 신자가
되지만 “주라!”는 사명에 충실하면 점차 축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운명은 ‘주는 삶’을 실천하는 신자에게 달려있고, 우리 가정과
우리 영혼의 운명도 ‘주는 삶’을 실천하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그처럼 주는 삶은 우리의 행복과 보람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전세계에 걸쳐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분들과 어렵게 사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위해 ‘주는 삶’을 몸소 실천함으로 희망을 전해주는 작은
민들레 홀씨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 이한규님 참고 -(가사방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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