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장미 주일)
2역대기 36,14-16.19-23
에페소 2,4-10
요한 3,14-21
"고통과 죽음 한가운데 피어난 생명의 꽃"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성경에서 이 구절만큼 우리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이 십자가상에서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주셨다’ 고 하는데, 그것도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 자식을 ‘내주시는’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나 있는 아들을 적진에 보내어 죽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의 아들을 팔아서 우리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분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이런 의문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의문과 이치와 맥을 같이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으로 우리가 삶에서 겪는 고통과 죽음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고 느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들이 고통당하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마도 부모의 마음이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통당하시는 하느님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고통을 완전성의 결핍이나 상처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알지만 느끼지는 않으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요, 남남입니다.
무정한 하느님이요, 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입니다.하느님께서도 십자가의 아들 예수님을 보시고 극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버림받고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겪으십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고통을 모르거나 고통을 함께하지 않고서는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고생으로 일그러진 부모의 얼굴에서 사랑을 깨달을 때, 자식의 마음은 부모에게로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날 때,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고통이 사랑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온갖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후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 한가운데 피어난 생명의 꽃임을 깨닫는 은총을 간구해 봅니다.
- 춘천교구 이 명호 베드로 신부님 강론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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