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 예수님이 남기신 정표, 성사
성사, 예수님의 몰아적 사랑
'서울주보'에 실린 한 신부님 이야기가 코끝을 찡하게 한다.
사제는 자신이 몸담았던 공동체를 평생 짝사랑처럼 마음에 담고 삽니다.
한번은 장례식이 있어서 먼저 있던 성당에 가야 했는데,
멀리서 성당 종탑이 보이자 심장이 쿵쿵 뛰었을 정도입니다.
공동체와 맺은 추억은 사제 생활에서 큰 행복과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인사 이동이 반복되고 이별의 아픔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마음을 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합니다.
새 임지에서는 냉정하게 마음을 먹고 정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정작 임지를 떠날 때 고별사를 하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아려 옵니다.
첫 주임신부로 사목했던 구파발성당을 떠날 때입니다.
마지막 고별 미사가 있던 일요일 내내 4학년짜리 꼬마가 하루 종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 녀석은 내가 성당에 처음 부임했을 때 꽃을 준 화동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유치원을 다니는 꼬마였는데, 어느 틈에 키도 훌쩍 크고 늠름해져 있었습니다.
막상 내가 떠난다고 하니 내심 섭섭했나 봅니다. 낮부터 집에 안 가고 내 주위를 서성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와서 "신부님과 헤어지는 것을 무척 섭섭해 한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밤이 됐는데도 집에 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려, 나는 일부러 야단을 쳤습니다.
"이 녀석아, 이제 집에 가야지. 하루 종일 공부도 안하고 성당에서 뭐 하는 거야?"
나는 녀석 마음을 모른 척했습니다.
"신부님, 내일이면 다신 못 만나잖아요. 그래서…."
금방이라도 아이 눈에서 눈물이 흐를 것 같았습니다.
그 애 눈을 보자 나도 하루 종일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난 눈물을 안 보이려 돌아서면서 짧게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이젠 어서 집으로 가" 하고는 사제관 문을 쾅 닫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그 녀석이 서 있었습니다.
"신부님, 이제 집으로 갈 테니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신부님이 쓰시던 손수건 한 장만 주세요.
손수건 보면서 신부님 생각할게요."
이윽고 녀석은 내 손수건을 받아 들고 기뻐하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난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 아이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어엿한 청년이 됐을 그 녀석이 아직도 내 손수건을 가지고 있을까….
(2004년 3월21일 '서울주보')
사람은 정(情)을 지닌 동물이다. 정 때문에 울고웃고 하며, 그 정을 추억하며
흐뭇한 미소에 잠기기도 한다.
그 정을 길이 간직하려고 정표를 주고받기도 한다.
보이는 물건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담아둘 줄 아는 게 사람이다.
이처럼 우리의 소중한 마음과 추억을 담고 있는 사물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가족이 함께 쓰던 찻잔, 어머니가 쑨 옥수수죽, 아버지가 남겨 놓으시어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재떨이, 낡은 책상, 성탄절에 선물 받은 굵직한 양초,
꽃병, 고향 마을 오솔길, 부모님과 함께 살던 옛집 등등….
이런 사물들에서 우리는 무언의 말을 듣는다.
이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들 목소리와 메시지를 듣게 된다.
이들은 다른 것들과는 구별되면서 그 안에 현존하는 그 무엇을 간직하고 표현하고
회상시키고 보여주며 전해 준다.
상징이나 징표를 원하는 사람의 속성을 하느님께서는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표현하시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건들을 사용하신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회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수긍하게 된다.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이러한 피조물들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 활동이
표현되는 수단이며, 동시에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인간 행위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생활을 위한 표징과 상징도 마찬가지다.
씻고, 기름 바르고,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행위들은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 현존을 드러내며
창조주께 대한 인간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148항).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손으로 만지고 싶어한다.
심지어 하느님 사랑까지도 무언가 보이는 것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의 욕구를 하느님은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당신 사랑을 드러내주셨다.
이것이 바로 성사(聖事)다.
요컨대,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는 거룩한(聖) 은총을 보이는 것(事)을 통해 베푸시는 것을 성사(聖事)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는 사랑의 보이는 정표로서 남겨주신 성사의 전범(典範)이 성체성사이다.
마지막 작별의 때가 오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빵으로 볼 수 있게 해 제자들에게 나눠 주셨다.
당신 몸을, 곧 그 만큼 사랑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놓으셨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 26,26).
이윽고 예수님은 당신 피를, 죄의 용서를 위한 계약의 증표로 내어주셨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 말씀을 이루셨다.
이로써 양의 피흘림을 통한 구약의 파스카(희생) 제사가 예수님 피흘림을 통해 추월불가능하게 완성됐다.
하느님 구원(救援)섭리가 예수님 십자가 제사를 통해 궁극적으로 완수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기묘한 사랑의 업적이 모든 세대에 대물림하며 생생하게 재현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명하셨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그 덕에 우리는 오늘도 '밥'이 되시는 예수님을 먹으며 살고 있고, 그 피흘리심의 능력으로 날마다 죄를
용서받으면서 '거룩한 사람'(사도 26,1)이 되어 감지덕지하게 살고 있다.
성체성사뿐이 아니다.
다른 성사들에도 이러한 자기희생적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
모든 성사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몰아적 사랑이다.
ㅡ(가사방에서 옮김)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