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을까?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칩니다.
성서는 지옥을 ‘유황불’이 들끓고 있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근래에 와서 신학자들은 지옥에 대해서 심각하게 물었습니다.
“과연 성서가 말하는 그런 지옥이 존재할까?”, “그리고
그런 지옥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렇다면 그 하느님을 우리는 과연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결과 가톨릭 교회는 다음의 결론을 취하였습니다.
첫째, 지옥은 불이 활활 타거나 사람을 질식시키는 그런 장소(라: locus)가 아니라,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에 처하는 고통의 상태(라: status)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기를
고집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단절(斷絶)되는 것 자체가 영원한 고통이며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이란 이처럼 하느님과 복된 분들과 이루는 친교(親交)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거부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을 이미 이 세상에서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져야만 할 때
‘맛보기’로 치르게 됩니다.
둘째, 이런 지옥의 고통은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떨어져 나감으로써
초래하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곧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옥에 대한 성서의 단언과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사는 이는 ‘지상의 지옥’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한 인간이 이웃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배척한다면 그의 삶 안엔 ‘이미’ 지옥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볼 줄 모르고 영원히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그래서 흔히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들 합니다.
지옥이라는 주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 속에서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지옥은 주로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 중에 거론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인간은 구원될 수도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주권(主權)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라고 엄중하게 촉구하십니다
(히브 9,27; 마태 22,13; 25,26.30-46 참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 차동엽 신부님의「여기에 물이 있다」중 에서 (가사방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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