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사랑과평화

십자가와 해산의 고통

까치산 2008. 5. 10. 10:13
    십자가와 해산의 고통 아침 산보하는 길에 만난 어떤 부인이 내게 말한다. “신부님 강론이나 강의를 들으면 선교를 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워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 이웃들에게 성당에 나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요?”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내가 너무 ‘나부터 복음화’를 강조한 것인가? 그래서 이 말이 남에게 선교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들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데 부인이 말을 잇는다. “신부님은 늘 희생과 십자가를 강조하는데 그들에게 희생하며 살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하겠어요.” 부인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은 대충 이렇다. 우리가 종교를 찾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적어도 종교가 나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고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음이 울적할 때 기도하면 달래주고, 괴로울 때 기도하면 씻어주고, 고통스러울 때 기도하면 고통에서 씻어주고, 그렇게 종교가 마음에 평화를 찾아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선교를 한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찾아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내 강론은 평화보다는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평화를 찾아 온 사람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덜어줄 생각은 않고 계속 십자가를 내미는 격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오랜 동안 신자 생활을 해서 십자가에 어느 정도 맛을 들이고 있지만 처음 성당에 나오는 사람에게 십자가에서 맛을 보라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덜어주어야지 어떻게 십자가를 지라고 할 수 있는가? 부인의 말은 옳다. 성당마다 십자가가 걸려 있고 매일 우리의 몸에 십자가를 긋고 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내려놓고 싶은 십자가일 뿐이다. 하지만 성당에서 십자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십자가가 사라지는 날 그 건물은 더 이상 성당이 아니다. 나는 부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자기 생에 지워진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 있을까? 자기 인생에 지워진 십자가를 내려놓으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식이 십자가라고 내 인생 밖으로 내려놓는다고 내 마음이 편안해질까? 이들과 인연을 끊음과 동시에 내 마음은 더 무거운 십자가에 짓눌리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를 내려놓으면 인생이 가벼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십자가를 지는 원리도 이와 같다. 십자가를 지면 인생이 무거울 것 같지만 지고 가는 것이 내려놓았을 때보다 더 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십자가를 내려놓는 것이 상책인가? 지고가야 하는 것이 상책인가? 이런 고민이 우리에게 또 다른 형태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는 후자의 길을 제시한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참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십자가를 내려놓은 행복은 참 행복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해산이 가까우면 여자는 그 고통 때문에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 근심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피하면 새 생명에 대한 기쁨도 없다. 십자가의 원리도 같다. 십자가를 피하는 날 행복의 기쁨도 피해가게 될 것이다. 인생을 사는 우리는 해산할 때가 가까워진 여자와 같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행복을 추구하는데도 행복하지 못한 것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재물과 권력과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는 마음이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준다. 새 생명에로 태어나는 행복을. - 이제민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