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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묵상(루카 3,15-16.21-22) - 주님 세례 축일

까치산 2025. 1. 12. 10:43

 

 

주님 세례 축일

이사야 42,1-4.6-7   
사도행전 10,34-38   
루카 3,15-16.21-22

+찬미예수님

 


이탈리아의 우르바니아라는 시골 동네에서 어학을 하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같은 어학원을 다니던 한 학생이 세례를 받고 싶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관할 구역의 이태리 본당 신부님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갑자기 저와 제 동기 신부에게 교리를 가르치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바쁠 뿐 아니라 이러한 기회가 저희와 그 학생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만약 그 학생이 한국인이었다면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겠지만 문제는 그 학생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와 제 동기신부는 당연히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때는 이태리어를 배운지 막 5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희의 긴 사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종교에 대한 개념이 아예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예수님의 생애, 성사의 의미, 삼위일체 등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어떻게든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고 번역기를 돌려가며 애를 써야했고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손짓발짓으로 교리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 학생 역시 처음에는 교리를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분명한 의지가 있었으므로 각자 노력하며 함께 합을 맞추어 나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 중국인 학생이 세례를 받게 되었을 때, 이태리의 시골 성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온전히 그를 위한 세례식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 미사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렇게 모든 미사가 끝나고 제의실에서 이태리 신부들과 신학생들과 사진을 찍고 미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할머니 몇 분이 그 학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안아주며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씀을 하시더니 끝내 눈물까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그러면서 하셨던 말씀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선물이니 그 신앙을 소중하게 간직하라는 충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례를 떠올려보면 세례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 세례를 베푸는 교회의 의지, 그리고 본인의 의지입니다.하느님의 의지에는 본인의 결심과 세례를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 등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의지에는 대상자에 대한 선택과 배려가 속하며 본인의 의지에는 세례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전제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세례를 받을 수 있으며 신앙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유아세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는 본인의 신앙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이 아이를 신앙인으로 선하게 키우겠다는 부모의 의지로 대체되며 이는 곧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식 때에 세례 받는 모든 이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세례를 이미 받은 우리들은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언제나 이를 기쁘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예리고의 동쪽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까지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오게 됩니다.당시 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자렛으로부터 요르단 까지의 거리는 약 130km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거리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직접 걸어오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은 당연히 세례를 베풀기를 주저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곧 “속죄, 회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는 속죄와 회개가 필요 없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 세례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효과, 즉 성령의 내려옴을 야기합니다.이것은 곧 지금까지의 세례와는 다른,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질 앞으로의 세례 성사가성령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삶을 인간에게 선사할 것을 의미합니다.이렇게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안에도, 제가 앞서 말씀드린 세례의 조건, 하느님의 의지,세례를 베푸는 교회의 의지, 그리고 본인의 의지가 온전히 존재합니다. 즉 여기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 요한의 순명의 의지, 회개와 속죄의 모범이 되는 예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지들의 조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이 시간까지 연결되어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게 되고 성령의 은총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나에게 있어서 세례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그저 나의 의지 혹은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 받게 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지요.그리하여 가끔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 게을렀거나,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것이 막연한 의무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분명 여기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의지가 있었으며 세례를 베푸는 교회의 열성어린 의지 또한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소중히 간직하며 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언제나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기억하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선하게 살아나갈 때, 우리는 삶의 끝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멘.                

 
- 서울대교구 방 종우 야고보 신부님 묵상 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