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원리이며 계획인 성체성사
엠마오의 두 제자는 주님을 알아보고는 “곧 그 곳을 떠나”(루카 24,33 참조)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알려 주러 갔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 뵙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체험한 그 기쁨을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게 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심화되는 그리스도와 만남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증언과 복음화의 절박성을 일깨워 줍니다.
저는 바오로 성인이 한 말을 바탕으로 이를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코린 11,26).
바오로 사도는 식사와 선포를 밀접하게 관련지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며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은
그 예식이 되살리는 사건의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미사 끝에 하는 파견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임무로서,
그들이 복음을 널리 전하고 사회에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고취시키도록
노력하라는 권유입니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사명에 필요한 내적 힘을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 계획이기도 합니다.
성체성사는 존재 양식으로서, 곧 예수님에게서 개별 그리스도인에게로 전달되고,
이들의 증언을 통하여 사회와 문화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희생 제사, 아버지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순종’ 안에는 모든 인류의 ‘순종’과 ‘감사’와 ‘아멘’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이 위대한 진리를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망각하고 홀로 서려고 헛되이 추구하는 오늘날의 세속화된
문화적 상황에서 특히 절실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살고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곧 가정이든, 학교든,
일터든, 삶의 모든 현장에서 성체성사의 ‘계획’을 실현한다는 것은 인간의
실재가 창조주와 관련을 맺지 않고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사목 헌장, 36항)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더욱 설득력 있게
증언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고 우리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증언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의 문화’는 대화의 문화를 촉진하고, 그것에 힘과 자양분을 줍니다.
신앙에 대한 모든 공개적 발언은 국가와 국가 제도의 정당한 자율성을 해치거나
나아가 불용의 자세를 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제가 희년을 맞아 인정하였듯이,
이 영역에서 신자들이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것을 역사가 입증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뿌리에 충실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을 탓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자세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순교자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박해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에서 친교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연대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성찬례 거행을 통하여 교회는 자신이 하느님과 이루는
긴밀한 결합과 또 온 인류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라는 인식을
끊임없이 새롭게 합니다.
모든 미사는 드러나지 않게 또는 외따로 드릴지라도 언제나 보편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상황에서 친교와 평화와 연대의 촉진자가 되는
법을 배웁니다.
새 천년기를 테러리즘의 망령과 전쟁의 비극으로 시작한 이 혼란한 세계는
그 여느 때보다 더, 그리스도인들이 성체성사를 사회, 문화, 정치 생활에서
다양한 책임을 지며 대화와 친교의 촉진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위대한 평화의 학교로 체험하는 법을 익혀나가도록 요구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진정한 친교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한 가지를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찬례가 공동체에 더욱 정의롭고 우애로운 사회 건설에 실제적으로
투신하도록 재촉하는 자극입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 하느님께서는 인간관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힘의 모든
기준을 뒤엎으시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는 섬김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천명하시면서,
최상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이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 대신,
‘발씻김 예식’(요한 13,1-20 참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려고 몸을 숙이심으로써 성체성사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가난한 이들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표현되는 애덕이 결여된
성찬례 거행은 적절치 못하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1코린 11,17-22.27-34 참조).
수많은 사람을 허덕이게 하는 기아, 개발도상국을 괴롭히는 질병들, 노인들의 고독,
실직자들의 불안, 이민들의 고충과 같은 비극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막대한 부를
지닌 지역에서도 발견되는 악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요한 13,35; 마태 25,31-46 참조).
이것은 성찬례 거행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중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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